연초 국내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저마다 신년사로 `디지털`을 거론하고 있다. 특히 굴지의 정유 기업을 계열사로 둔 한 대기업 총수는 초경쟁 시대에 고객의 숨겨진 니즈를 파악하는 도구가 디지털이라는 점을 임직원에게 강조했고, 보유한 핵심 기술에 디지털 역량을 접목하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그는 핵심 산업과 연관된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는 것도 디지털의 역할이라고 언급했다.

대표적 굴뚝 산업으로 여겨졌던 정유화학. 소비재나 서비스 산업과 달리 대규모 장치 산업이기에 디지털 혁신의 영향이 더뎠던 분야다. 안정적인 공정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변화를 가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유화학 업계가 언제까지 디지털 혁신의 바람을 외면할 수는 없다. 과거 방식과 전혀 다른 `디지털 방식`이 어느새 모든 산업, 기업의 틈새에 자리 잡아 기존 노하우를 과거의 유물로 만들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엑손모빌, 토탈, 셰브론, 셸, BP 등 글로벌 선도 정유화학사도 이미 2015년 전후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그 과실도 맛보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 한국을 떠들썩하게 한 스마트팩토리나 4차 산업혁명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세부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플랜트 생산·공정·운영뿐 아니라 고객 접점, 협업, 제품·서비스와 연계까지 파급 범위가 비즈니스 모델 전반으로 확대된 것을 의미한다. 일정 분야 개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을 만들어 낼 정도의 변화를 목표로 한다. 앞서 언급한 주요 선도 화학사는 인공지능(AI) 전문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를 핵심으로 디지털 조직을 육성하고 이를 다양한 영역에 활용하면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끼웠다.

주목할 점은 글로벌 선도사보다 사업 규모가 작은, 지역 내 강자(regional champion) 또는 단일 시장 내 강자(local champion)인 업체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박차를 가하면서 경쟁력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정학적 관계, 유가 변동 등에 따른 불확실성이 높은 정유 산업에서 이 기회를 잘 살린다면 위기를 모면할 뿐 아니라 선도사의 위치까지 위협할 정도로 성장할 수도 있다.

스페인 정유사 렙솔(Repsol)과 이탈리아 정유사 사라스(Saras)는 공격적인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수년 전부터 추진했고 고무적 성과를 얻었다.

렙솔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시작했던 2016년 업계 평균 이상으로 수익을 창출하던 견실한 기업이었다. 따라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통해 운영 방식을 개선하겠다는 단기 목표보다 미래 정유 사업의 지향점을 고민했다. 렙솔은 업계 최초로 고도의 애널리틱스에 기반한 공장 운영의 획기적 변화, AI 기반 주유소 방문 고객별 차별적인 상품 추천(일명 페르소나 AI) 등 파격적인 실행으로 성과를 창출했다. 이 회사는 10개 디지털 직군을 정의해 새로운 역량 확보에도 앞서 나갔다.

사라스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단행한 2015년 사업 운영 최적화에 어려움을 겪으며 매출 부진에 시달렸다. 이 회사는 미래를 선점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보다 사업의 턴어라운드가 시급했다. 사라스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정보기술(IT) 도구를 통해 부서별 커뮤니케이션을 돕거나, 공장 오퍼레이터의 관리 포인트 체계화 등 일하는 방식 개선을 도모하는 과제를 중점적으로 진행했다. 그러다가 점차 고도화한 디지털 기술이 접목되는 방식으로 진화했는데, 나중에는 빅데이터와 애널리틱스에 기반한 설비 투자도 단행할 수 있었다.

두 회사의 출발점과 지향점은 각기 달랐지만 디지털 변신을 통한 역량 개선에 집중한 점, 포괄적인 디지털화를 진행한 점은 유사했다.

이제 국내 정유화학 기업도 디지털의 힘을 빌려 경쟁력을 제고해야 할 때다. 수시로 진행되는 석유화학 설비 투자도 경쟁력을 쌓는 전략의 한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추진으로 기존 실력을 업그레이드하고, 고착화된 일하는 방식을 개선하는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통해 기존의 시각적 관리 시스템을 보강하면 공장의 특정 부분에 대한 운영을 전략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제품 믹스를 변경하는 방법에 대해 관리 팀과 플랜트 팀 간 격차도 해소된다. 설비 가동을 중지하는 시간과 유지 보수에 대한 지출, 부품 재고를 줄이는 수단으로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얼마든지 인사이트를 제공해줄 수 있다.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드리운 초경쟁 시대에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단순한 기술 도입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소극적인 방식이다.

정유화학 사업형모델 관점과 고객 니즈 파악에 이르기까지 연쇄 영향을 고려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지금 당장 실행해야 한다.